얼마 전 팀 세미나에서 한 동료가 이런 말을 했다. “AI가 발전하면서 우리가 ’생각’을 외주 주고 있는 것 같다”고.
듣는 순간 뜨끔했다. 요 몇 년간 나도 똑같이 느끼고 있었으니까.
시작이 어렵다는 문제, AI가 풀어줬다
모든 일은 처음이 제일 어렵다. 어떻게 시작할지, 구조를 어떻게 짤지, 어떤 순서로 갈지. 이 밑그림을 그리는 데 시간이 제일 많이 든다.
AI는 이 첫 삽을 대신 떠준다. 막막한 백지 앞에서 한 시간 붙잡고 있을 걸, 대충 개요만 던지면 5분 만에 뼈대가 나온다. 이건 진짜 엄청난 리소스 절약이다. 부정할 생각 없다.
그런데 뭔가를 잃고 있다
부작용은 조용히 온다.
이제 무슨 일을 시작할 때, 나 혼자 진지하게 고민하기보다 개요만 훑어서 AI에게 넘기는 일이 많아졌다. “기획서 작성해줘”, “이거 이렇게 하려는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 이런 식으로 내가 해야 할 ‘목적’ 자체를 AI에게 던져놓고, 나온 결과에 내 생각을 끼워 맞추고 있다.
아무리 Human in the Loop라고 해도, 대부분의 생각은 AI가 하고 나는 이게 맞는지 틀린지만 고른다. 그렇게 고른 건 이상하게 머릿속에 오래 남지 않는다.
그림으로 치면 이렇다. 예전엔 밑그림도 내가 그리고, 색도 내가 칠하고, 완성까지 내가 했다. 그런데 2024년 이후로는 밑그림만 내가 그리고 색칠은 AI가 대신 해주는 느낌이다. 결과물이 맞는지 틀린지는 내가 결정하니까 ’내가 완성했다’고 치더라도 말이지.
아이언맨의 자비스처럼 내 말을 찰떡같이 알아듣고 움직여준다면야 더할 나위 없겠다. 하지만 현실의 AI는 내가 의도한 것과 다르게 흘러가는 일이 부지기수다.
AI를 ’샌드백’으로 쓰기
그래서 요즘 방식을 하나 바꿔봤다.
어떤 일을 시작할 때 바로 AI에게 묻지 않는다. 먼저 5분만 내 머리로 적는다. 완성도는 낮아도 된다. 핵심 질문, 내 판단, 가능한 방향, 막히는 지점만 적는다. 그 다음에 AI를 쓴다. 그러면 AI는 내 생각을 대체하는 게 아니라, 내 생각에 반응하는 도구가 된다.
한 발 더 나간 방법도 있다. AI에게 내 글을 정갈하게 다듬어 달라고 하지 않는 거다. 대신 이렇게 시킨다.
“내 초안을 다듬지 마라. 대신 내 주장에서 논리적 허점 두 개랑, 현실적으로 실행 불가능한 이유 두 개를 날카롭게 지적해라.”
AI가 내 글을 칭찬하거나 정리해주면 뇌는 편하게 도망간다. 반대로 AI가 내 글을 ’공격’하게 만들면, 방어 기제와 승부욕이 발동해서 스스로 재반박 문장을 쓰게 된다. 편집자가 아니라 논박가로 쓰는 것이다.
그리고 원초적인 질문 하나
여기까지 오니 더 근본적인 게 걸린다.
내 메모들에 붙어있는 ’완료’라는 상태값, 이게 의미가 있는 걸까?
정보는 끊임없이 변하고 진화한다. ’완료’라고 치부해뒀던 메모들도 결국엔 다시 꺼내서 고치고, 키워야 하는 게 필연적이다. 그렇다면 애초에 ’완료’라는 상태를 박아놓는 것 자체가 모순 아닐까.
어쩌면 지식이라는 건 완성되는 게 아니라 계속 자라는 것에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내가 진짜 지켜야 할 건 ’완성된 결과물’이 아니라, 불편한 문제 앞에 무르익을 때까지 앉아있는 그 시간일 것이다.
AI에게 색칠을 맡기더라도, 밑그림을 그리는 손만큼은 내 것으로 남겨둬야겠다.
